“ 미세스 리,
팔에 흉터가 있네?
어릴 적에 무척 나댔었나 봐.” 어느 날 예배 후 파트락 설거지를 하던 K 집사님이 무심코 내게 던진 한마디다. ‘그래, 흉터였구나… 그러네. 흉터가 있었네…내 팔뚝에…’
사실이다. 내 왼쪽 팔뚝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흉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화상 흉터가 있다. 성장하면서 어린아이 시절에,
사춘기 시절에,
청년 시절에 그 누구도 나에게 왜 흉터가 있냐고 묻지도 않았고 놀림을 받은 적도 없는 흉터가 있다.
왼쪽 손목과 팔꿈치 사이의 윗면에 기다랗게 한 줄 뭉쳐진 화상 흉터가 있다. 이제는 피부가 노화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런 흉터이다. 불혹의 시기가 훨씬 넘은 나이에 이런 얘기를 듣다니 생소하기도 하고 잊고 있었던 ‘뭔가’가 휙 하고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가 태어날 무렵에 나의 부모님은 남도의 한 상업 도시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도, 소매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가게에는 여러 명의 점원이 있었다. 그 당시 처음 나온 ‘00라면’은 20대 젊은 청년들이 좋아했던 간식거리였다. 어느 날,
두 살이 채 되지 않은 주인집 딸아이가 기어오는 것도 모르고 한가한 시간에 점원들은 라면을 끓여 간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소리 없이 다가온 어린아이 팔뚝 위로 기름기 많은 라면 냄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아이는 흉터를 입게 되었다.
부모님은 백방으로 치료법을 알아보다가 화상으로 얽어진 손의 재활을 위해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 교육을 하셨다.
화상으로 얽어졌던 손가락은 부모님의 지극한 피아노교육으로 흉터 없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지만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길게 엉켜진 두 줄은 어쩔 수 없이 흉터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의 팔뚝을 조석으로 마사지해 주시면서 “우리 00 팔뚝에는 태백산맥이 쭉 걸쳐있네.
아니 여긴 소백산도 연결되어 있네 ” 하시곤 하셨다. 언니가 윗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공부를 할 때면 그 박자에 맞춰 마사지를 해주시기도 하셨다. 또 영어단어를 외워야 할 때면 마사지해주시면서 문답으로 도와주시기도 하였다. 그 덕분으로 성장하면서 팔뚝이 길어지고 세포가 노화되면서 이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상태가 되었다.
성장기에 수줍음이 많고 나대지도 않고 조용했던 나에게 팔의 ‘흉터’는 ‘상처’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랑의 흔적이었다. 아버지가 사랑으로 감싸주신 나의 흉터는 자라오면서 누군가의 궁금증도 아니었고 사춘기 시절의 개구쟁이 친구들의 놀림감도 아니었고 더구나 부모님의 자책 거리도 아니었다. 돌아보면 지나온 세월이 축복이었다.
그 자그마한 화상 흉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고 자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예배 반주를 할 때면 “아,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연거푸 외치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촉촉한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바다 건너 이곳에 살다 보니 가끔은 팔의 ‘상처(?)’를 헤집는 많은 K 집사님들을 만나게 된다. 재림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이웃의 티를 크게 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내 팔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2018.12.29 14:27
"기억'이 아니고 "추억'인 것을 - 미주재림문학 제11회 신인상 수상작(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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